꿈꾸는 자는 무지하다.
by 달빛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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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실종의 시대
1.
10년 전 '초고속' 인터넷이 막 개통되기 시작하던 시기, '슬레이어즈'라는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푹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네띠앙이라는 망해버린 포털사이트도 그 시절에는 꽤나 잘나가던 사이트였다. 그 안에서는 수많은 동호회들이 활발하게 뛰놀고 있었다. '팬픽션'이라는 글타래들에 홀려 가입했던 팬사이트도 그 중 하나였다. 히키코모리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고등학교가 끝나면 어떤 메일이 와 있을까부터 생각하며 학교를 나서곤 했다. 그 시절은 이메일이 '시공을 초월해 사람들을 이어주던' 시대였으니까.

이것도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다. 중학교 시절 시간표에 '컴퓨터'라는 수업이 있던 시절. 한 주일에 더도덜도 않고 토요일 한 칸. 쉬는 시간마다 공 차러 나가던 아해들도 그 시간만 되면 컴퓨터실 철창 앞자리를 차지하려 머리가 터지도록 아귀다툼을 했다. 소중한 교육자재였건만, 선생들 가운데 고칠 사람이 없어 태반은 부팅이 안되는 고물 아닌 고물이었다. 그나마도 386이었다. 메일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30초 정도 기다려야 하던 시대, 친구들에게 보낸 메일은 상당수가 반송됐다. 덕분에 메일함은 욕설로 가득 찼다.

적어도 새로 빤 와이셔츠의 은은한 향내가 나는 비즈니스 메일보다, 개인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가 더 많았던 시대였다. '당신이 학생이었기에'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메일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그 시절의 카피에 공감할 수 있었던 축복받은 세대였던 듯하다. 텍스트의 내용에 관계없이 메일함의 무언가를 지울 때 망설임을 느꼈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 안온함 때문이었다.

십년 전의 그날처럼 한메일을 무심히 연다. 하지만 처음으로 만든 메일 계정에 로그인할 때의 치열한 가슴떨림은, 이젠 없다. 다음의 주황색은 그대로이되 온기가 느껴지던 그 사람들의 이름도 더이상 없다. 메일함에 가득찬 스팸을 지우지 않으면 1기가짜리 계정은 쓸데없는 이미지와 텍스트들로 포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건 지독히도 여상스러운 일상이다. 날마다 종량제 봉투를 골목에 내다놓는 것처럼, 내 방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처럼, 스팸 필터에 걸린 내 카드값 청구서를 이리저리 찾는 것처럼.

메일을 살펴보니 '보내는 이' 거의 전부가 기업이다. 가끔 보이는 한송이, 김미녀 따위의 이름은 십중팔구 '파티 초대' 스팸 발송자가 분명하리라.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의 메일함에서 인간의 냄새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멀고 멀어서 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던 연인들을, 구글어스의 도트보다 작은 친구들을 하나의 선으로 묶어주던 이메일이 실종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직도 '착한' 이메일 주소를 데리고 있다면 당신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내일은 친구들에게 실종신고를 한번 내보련다. 이메일을 찾습니다.
by 달빛이야기 | 2008/03/30 19:51 | SUPER TALK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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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너프 at 2008/03/30 20:43
요즘 이메일 사용할때는 주문확인할때나 웹하드 대신으로..생각해보면, 한때 인터넷의 상징처럼 쓰이던 게 이메일인데 참 시간 빠르죠. 디지털이라고 해도 항상 차가운건 아닌..그런시절이 왔군요.
Commented by ALbaTro at 2008/03/30 22:56
메신저가 일상화 되면서 이메일보다 더 빠른 반응을 원하는 사람의 심리 덕분에 이메일이 밀려난게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몇년 뒤에는 실제로 바로 앞에서 대화 하는 것과 같은 화상 대화에 밀려나는 메신저의 모습을 보며 지금처럼 회상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도 싶네요 ^^
Commented by 달바람 at 2008/03/30 22:59
메신저를 통해 멀리 사람들간의 거리가 더 가까워져서, 이메일이 점점 의미를 잃어갑니다만, 가끔 이메일만의 '짠'한 느낌이 그립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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