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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며칠 전 생신을 맞으셨다. 승진도 했겠다 겹경사로다. 덕분에 저번 주말엔 눈도장이라도 찍어야겠다 싶어 집에 슬쩍 들어갔다. 손에는 생신 선물을 달랑달랑 흔들면서. 문화행사라면 '나훈아 디너쇼'라든가 '인순이 디너쇼'밖에 없는 줄 알고 계신 당신이기에, 언젠가 개안(開眼)을 시켜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서의 의무라는 생각을 해왔었다. 불효자로서는 꽤나 큰맘먹고 산 표딱지의 정체는 뮤지컬 '맘마미아' VIP석 2장이다. 나도 보지 못한 공연이었다만, 선물을 받으신 부모님께서 너무도 기뻐하셨기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근데 제발 ABBA를 아빠라고는 읽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2. 말 그대로 정글처럼 쌓여있던 난에 달려들어 정리를 하니 허리가 뻐근했다. 정리를 마치고, 온 가족이 쇼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감상하고 있었다. "남편들이 '사랑한다'는 문자를 갑자기 부인에게 보냈을 경우, 아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재미있는 반응들이었다. 하긴 무뚝뚝하고 일밖에 모르고, 들어오면 곯아떨어지기 일쑤인 아저씨들이 갑자기 결혼 전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부끄럽고 쑥쓰러울지도 모르겠다. 바가지를 긁던 아내들이 순한 양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달까. 나라면 광고멘트처럼 '사랑한다면 하루 세번' 우유 먹듯 보내줄텐데 말이야. 방정맞은 내가 가만히 TV를 지켜보기만 했어도 그날의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옆으로 쓱 돌리고 물어봤다. 아버지는 턱을 쓰다듬고 계셨다. 달군 : "아버지도 저런 문자 보내나?" 아범 : "쿨럭." 나는 움찔했다. 거지 발싸개같은 주둥이. 아버지께서 치즈를 먹다 말고 신비로운(아버지가 생각하기에) 미소를 띄웠다. 아…안된다. 엄청 수상쩍은 미소다…절대 여기서 선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더 캐물어서는 위험한 것을 건드리게 된다고, 햇병아리 기자의 경험과 직감이 내게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미 저번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파고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슬금슬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고개의 각도를 TV로 조금씩 돌렸다. 순간 의외의 복병이 끼어들었다. 옆에서 다소곳이 사과를 깎으시던 어머니였다. 어멈 : "어머나♡ 얘는 무슨. 아버지가 얼마나 부드러운 남자 인데~" 푸붑. 순간적으로 씹던 사과를 코로 뿜어버렸다. 애플즙이 사방으로 분사되는 것을 보신 어머니께서는 기분이 상하신 모양이었다. 철썩 나를 때렸다. "얘가 못 믿나보네. 기다려봐." 어머니는 안방으로 득달같이 달려가 휴대폰을 가져왔다. "안돼, 다시 그럴 수는 없다!!" 나는 도망치려 했지만 몸이 마비된 듯했다. 아 아니…아버지가 날 못 일어서게 누르고 있는 거였다. 얼굴은 웃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잖아. 당했다. 달군 : "안돼!!" 어멈 : "돼!!"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검지와 중지로 나의 눈을 억지로 벌리려 하셨다. 아니 이건 뭐 70년대 공안 수사도 아니고 왜 사람 눈을 까뒤집는댜. 아놔 사람살려!!!! 두 팔을 뒤로 잡힌 상태에서는 반항할 수가 없었다. 눈이 게슴츠레하니 강제로 벌려졌다. 순간, 총천연색 640만화소 액정화면의 문자들이 나의 시신경을 강타했다. 자극은 통렬했다. 신경을 지나 대뇌를 관통했다. 총에 맞은 것마냥 나의 동공이 확대됐다. 문자가 휙휙 옆으로 넘어갔다. 속독이 버릇된 나의 시신경은 습관에 충실했다. 읽지 않으려 해도 잔인하게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MIB의 광선을 맞은 것마냥 몸에 힘이 빠졌다. 응, 누구라도 그럴거야. 3. 1) 당신은 여전히 한 떨기 청초한 백합과도 같구려. 내겐 오로지 그대밖에 없소. 2) ♡영원히 사랑하겠네♡ 사랑하오. 3) 오늘밤 제천의 하늘은 별가루가 쏟아지오. 하지만 당신의 눈빛보다 못하구려. 4) 귀염둥이, 오늘은 일찍 들어갈 것 같소. 5) ♥♥♥♥♥♥♥♥ ♥사♥♥♥♥♥♥ ♥♥랑♥♥♥♥♥ ♥♥♥해♥♥♥♥ ♥♥♥♥여♥♥♥ ♥♥♥♥♥보♥♥ ♥♥♥♥♥♥♥♥ 인간은 진화한다. 아버지도 진화한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문자도 진화한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이며, 막을 수 없는 시류이자 인류의 거대한 걸음이다. 나는 그 진보에 울었다. 전미가 울었다. 닭살이 돋았다. PS> 아버지께서 그런걸 왜 보여주냐며, 얼굴이 빨개져 뿡뿡 화내면서 방으로 들어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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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는중 직장인 몽상가 최근 등록된 덧글
고맙습니다 헤헤^_^
by 달빛이야기 at 10/06 정말로 신장 팔 것 같습니다... by 달빛이야기 at 10/06 오랜만이예요. 역시 감사 .. by 달빛이야기 at 10/06 아 저런...-_-; 축하를 .. by 달빛이야기 at 10/06 전 가우루에요! by AKI☆ at 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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